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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in Art]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의 일생과 표현기법

2023년 03월 24일 17시 44분
■ 박수경 / 아트디렉터

[앵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은 극적인 명암 표현으로 '빛의 화가', '빛과 어둠의 마술사'로 불리는 작가입니다. 오늘 '사이언스 in art' 에서는 렘브란트의 생애와 표현 기법, 그리고 당시 유행했던 그룹 초상화 이야기도 나눠보겠습니다. 오늘도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 어떤 작가인지 소개해주시죠.

[인터뷰]
네, 빛과 어둠을 굉장히 잘 표현해서, 빛의 화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렘브란트 반 레인은 1606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인문학과에 진학했지만, 미술에 재능이 많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하는데요. 역사화가로 유명한 야코프 반 스바넨뷔르흐 밑에서 도제식으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이후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활발한 작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데요. 특히 1632년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작품으로 크게 명성을 쌓습니다.

렘브란트는 작품 속에 명암 대비를 아주 탁월하게 표현하는데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빛 배합을 통해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특징이 있습니다. 유명해지면서 작품 의뢰가 많아지고 또 렘브란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제자들도 줄을 서게 되는데요. 1669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적인 작업으로 많은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앵커]
렘브란트가 활동했던 당시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였다고요?

[인터뷰]
네, 맞습니다. 네덜란드의 황금기라고도 불리는데요, 이 시기는 약 1588년부터 1672년 정도까지를 말합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무역과 과학, 예술 등 다방면으로 유럽 국가 중에서 최고의 전성기였다고 하는데요. 특히 미술 같은 경우는 역사화와 더불어서 정물화, 풍경화 등이 크게 성행했습니다. 렘브란트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고요, 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작가죠. 요하네스 베르메르 같은 작가들이 이 네덜란드 황금기에 활동했습니다.

[앵커]
이 풍요로운 환경에서 렘브란트도 자신의 예술혼을 마음껏 불태웠을 것 같은데, 앞서 렘브란트를 '빛의 화가'라고 소개하셨잖아요. 어떤 기법인가요?

[인터뷰]
렘브란트가 명암 대비를 표현하는데 사용한 기법을 ‘키아로스쿠로 기법’이라고 하는데요. 이탈리어어로 키아로가 빛을 뜻하고요, 오스쿠로가 어둠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키아로스쿠로 기법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는데요. 미술 뿐만 아니라 영화 등의 분야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작품 중에서 배경이 어둡고, 인물이 밝게 묘사된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예를 들면 17세기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인 ‘카라바조’의 작품들이 이 명암 대비를 탁월하게 표현했는데요. ‘일 테네브로소’, 즉 암흑 양식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지난 방송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 즉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표현하는 기법과 이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비교해서 보기도 하는데요. 빛의 정도에 따라 어떤 부분은 아주 강하게 드러나고, 어두운 부분은 아예 보이지 않아서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작품 속 일부를 조명할 수 있다는 부분이 키아로스쿠로 기법의 특징입니다.


[앵커]
렘브란트 그림을 보니깐 빛이 있는 부분을 시선이 좀 가고, 어둠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게 하는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렘브란트의 대표작은 어떤 작품들이 있나요?

[인터뷰]
렘브란트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준 대표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라는 작품인데요. 1632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가로가 2m가 넘는 대작입니다. 제목과 그림을 보면 아시겠지만, 해부학이 진행되는 듯한 풍경이죠. 모자를 쓴 사람이 바로 니콜라스 튈프 박사인데요. 누워있는 시신을 제외하고, 7명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각각 표정이 굉장히 생동감 있지 않나요? 표정이 다양하고, 선명하게 보이는데요. 바로 인물의 주변 부분을 어둡게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금의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뿐만 아니라 누워있는 시신과 튈프 박사의 해부 중인 손 등 해부의 과정까지도 한눈에 들어오도록 표현했죠.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당시에 암스테르담의 공개해부학 강의가 진행되는 곳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그리게 되었는데요. 이때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초상화가 크게 인기였거든요. 튈프 박사가 대중을 상대로 두 번의 공개해부학 강의를 했는데, 그중 두 번째인 1632년 강의를 주제로 그려졌다고 알려졌고요.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들로, 이 그룹 초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비용을 분배해서 지불 해야 했습니다. 누워있는 시신 또한 실존 인물인데요. 해부학강의가 진행됐던 날 처형된 범죄자의 시신이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앵커]
등장인물, 그러니깐 시신까지도 실존 인물이었다고 하니깐 더 흥미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룹 초상화라고 하셨는데, 어떤 개념인가요?

[인터뷰]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그룹 초상화 의뢰가 성행했었는데요. 길드라고 하죠, 조합이나 자치 단체 등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모두 똑같은 돈을 지불 하고 이 그룹 초상화를 의뢰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은 조합에 걸리게 되는데요. 모두가 같은 돈을 지불 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덜 그리고, 누구는 잘 그려주게 되면 비판받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렘브란트가 특히 이 그룹 초상화를 탁월하게 그렸는데요. 단순히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마치 어떤 무대를 포착한 것처럼 사람들의 표정과 스토리, 분위기가 시각적으로 드러나게끔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잘 표현했습니다.

[앵커]
네, 저희가 지금 이야기 나누고 있는 렘브란트 하면 '야경'이라는 작품도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사실 이 작품의 배경은 제목처럼 밤이 아니라 낮이라고요?

[인터뷰]
네, 렘브란트의 또 다른 대표작 '야경'이 있죠. 원래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중대'인데요. 짧게 '야경'으로 불리 웁니다. 작품명은 ‘야경’이지만 렘브란트가 묘사한 시간은 밤이 아니라 낮인데요. 제작 과정에서 바니쉬로 마감 처리를 하거든요. 시간이 지나 복원 할 때 이걸 벗겨내는데, 1940년에 이 작품의 바니쉬를 벗겨냈더니 캄캄한 밤처럼 어두웠던 부분들이 사실은 밝은 색감이었던 거죠. 어둡게 덮혀 있던 바니쉬 때문에 '야경'이란 이름이 붙었던 겁니다.

[앵커]
정반대로 불리고 있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작품도 실제로 의뢰받은 그룹 초상화인가요?

[인터뷰]
맞습니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의 실제 민병대 대장인 프란스 반닝 코크와 그 대원들이 함께 비용을 모금해서 의뢰한 작품인데요. 원래 그룹 초상화는 좀 틀에 박힌 형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의뢰한 사람들을 어색하게 줄을 세워 그리는 등 정적으로만 담았던 건데요. 렘브란트는 그런 틀을 과감하게 깨버립니다.

이 작품을 보시면 등장 인물들이 모두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죠? 또 각자의 이야기가 있어 보입니다. 작품에 총 34명이 등장하는데, 그중 실존인물 그러니까 작품을 의뢰한 사람들은 이 중에서 18명 정도고요. 나머지 인물은 렘브란트가 임의로 그린 건데요. 작품의 정중앙에 빨간 띠를 어깨에 두른 인물이 바로 반닝코크 대장입니다. 딱 봐도 주인공처럼 보이죠.

또 재미있는 것은 작품 좌측에 굉장히 눈에 띄는 한 여성이 있는데요. 유독 밝게 그려진 이 여성은 바로 렘브란트의 아내였던 ‘사스키아’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렘브란트는 초상화라고 해서 형식적으로 인물을 그린 게 아니라, 작품 안에 자신만의 어떤 스토리를 담았던 겁니다.

[앵커]
그러게요, 저희가 아는 초상화는 굉장히 어색하게 앉아있는 그림들을 떠올리는데 당시 굉장히 파격적일 수 있었겠네요. 이때 그림을 의뢰했던 의뢰인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인터뷰]
사실 민병대의 대장이자 암스테르담 시장이었던 반닝 코크는 아무래도 공개적인 공간에 걸릴 작품이고 군대이기 때문에 보수적인 묘사를 원했다고 합니다. 복장도 너무 화려하지 않고, 본인과 대원들이 대열로 서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렘브란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 한거죠. 결국 의뢰인들은 불평을 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때의 과감했던 시도가 훗날 미술계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겁니다.

[앵커]
오늘 여러 작품을 함께 봤는데, 마치 스마트폰 앱으로 극적인 필터를 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빛의 화가'라는 명성이 절로 이해됐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이언스 인 아트'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사이언스 김기봉 (kgb@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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