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이번에는 과학과 예술의 만남, '사이언스 앤 아트' 시간입니다.
오늘 '사이언스 앤 아트'에서는 세종대왕,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다”라는 주제로 세종대왕의 음악적 업적에 관하여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국립국악원 강다겸 학예연구사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종대왕이 남긴 역사에서 음악과 관련된 부분들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어떻습니까?
[인터뷰]
조선 초기 나라를 안정시키고 조선왕조가 500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훌륭한 정치를 편 임금이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세종 시대에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며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도 크게 발전하여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전성시대로 꼽히고 있습니다.
백성을 널리 이롭게하기 위한 매체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표기할 수 있는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하는 등 세종조(1418-1450)의 음악문화는 한국음악사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산물입니다.
[앵커]
그렇다면 세종대왕의 음악적 업적에 대해 자세히 좀 이야기 해주시죠?
[인터뷰]
세종대왕은 모든 음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 율관(律管)을 사용하여 음높이를 제정하고, 궁중의 제사 및 연회음악 연주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처음으로 창안해 낸 사실 등이 곧 그의 중요한 업적의 내용들입니다.
조선초기 문화사에서 특기해야 할 사실이 우리 민족의 문자인 한글의 창제 이듯이, 세종조 정간보의 창안과 신악(新樂)창제는 조선 초기 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정간보라는 악보와 세종대 창작된 신악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그럼 먼저, 세종대왕이 창안한 정간보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요?
[인터뷰]
정간보는 음악을 기보하는 악보입니다.
그 형태는 연속된 네모 칸으로 되어 있으며, 마치 원고지 같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네모 한 칸이 우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름에 우물 ‘정(井)’자를 넣고 한 칸을 ‘정간’이라고 부릅니다.
정간 1칸을 1박으로 인식되며, 1박의 기준은 음악에 따라 다소 느리게 혹은 빠르게 측정될 수 있습니다.
화면의 정간보는 세종 시대에 만든 신악인 '정대업' 중 '소무'의 악보입니다.
정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南(남), 黃(황) 등의 한자가 적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자들은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는데, 이를 ‘율명(律名)’이라고 하며, 율명은 남려(南呂), 황종(黃鐘)처럼 원래 두 글자이지만 편의상 앞의 율명의 첫 글자만 기입합니다.
이렇듯 정간보는 우물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놓고 네모 칸은 음의 길이를, 정간 안에 한자는 음의 높낮이를 보여줍니다.
서양 오선보도 음의 길이와 높낮이라는 동일한 음악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데요.
서양 오선보의 경우, 콩나물 같이 생긴 검고 흰 음표가 음의 길이를 나타내며, 그러한 음표가 다섯 개의 줄에서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음의 높낮이가 결정됩니다.
오선보와 정간보는 형체가 없는 소리를 잡아두기 위해 갖추어야 할 음의 길이와 높낮이라는 기본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다만 표출된 형태가 다를 뿐입니다.
세종대왕이 창안한 정간보를 ‘우리나라 최초의 유량악보’라고 칭송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청각을 시각화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기보법 정간보는 지금까지도 전통음악을 연주할 때 활용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앵커]
정간보에 이어 세종대왕이 창제한 신악(新樂) 즉, 새로운 음악도 있다고 하는데요, 이건 어떤 건가요?
[인터뷰]
세종 시대의 음악은 정간보를 활용하여 '세종장헌대왕실록' 권136에서 권146에 기록되었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악이란 세종대왕이 조선 창업의 공덕과 국운의 번영을 형용한 '용비어천가'를 기존에 전래되던 악장들을 참고하여 새로 곡으로 만든 '정대업(定大業)', '보태평(保太平)', '봉래의', '발상' 등의 악무를 말합니다.
'세종장헌대왕실록'악보에 전하는 15세기 '봉래의'를 국립국악원의 복원연주로 감상하시겠습니다.
봉래의는 "봉황이 오셨다"는 뜻으로 이는 ‘태평성대’를 의미합니다.
'세종장헌대왕실록'악보에 의하면, '봉래의'의 악곡은 '전인자', '진구호', '여민락', '치화평', '취풍령', '후인자', '퇴구호'의 7곡의 모음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인자'는 전주곡, '후인자'는 후주곡으로 가사는 없으며, '진구호'는 '봉래의'의 춤이 시작할 때 그리고 '퇴구호'는 마치고 물러날 때, 무용수들의 등장, 퇴장을 이끄는 죽간자가 하는 구호로, 한문시로 되어 있습니다.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을 지닌 '여민락'은 '용비어천가'의 1장에서 4장 그리고 125장의 한문 가사를 노래하며, '치화평'은 '용비어천가' 1장에서 16장 그리고 125장, '취풍령'은 '용비어천가' 1장에서 8장 그리고 125장의 한글 가사를 노래합니다.
세종 31년에는 '보태평', '정대업', '봉래의', '발상' 등 새로 정한 정재를 종묘, 조회, 연회에 사용하기 위해 익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봉래의'의 공연에 관한 기록은 많치 않으며, 인조 8년 (1630년)에 대비를 위한 진연에 쓰인 '봉래의'에 관한 기록 이후에 200년이 지난, 고종 30년(1893년)에 정재의 절차를 적은'정재무도홀기'에 기록이 전합니다.
세종대에 조선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제작된 '봉래의'가 조선조의 다른 정재에 비하여 많이 공연되지 않은 것은 '봉래의'가 방대하고도 다분히 실험적이며, 이념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까지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봉래의'정재와 그 반주음악의 전통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며, 국립국악원이 전통공연예술의 원형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재현되어졌습니다.
[앵커]
이렇게 세종대왕이 창제한 신악 가운데 또 다른 노래도 있나요?
[인터뷰]
세종은 조선의 건국과 백성들의 안정을 위해 애쓴 공덕을 더 간곡하게 표현할 수 있는 노랫말을 짓고, 이를 의례(儀禮)에서 악무(樂舞)로 현행함으로써 군신이 함께 의례와 연회에서 건국의 의의를 새기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창작된 신악 중 '보태평'과 '정대업'은 정전(正殿)에서의 문무백관의 모임인 회례의식에서 문신들을 위한 춤인 “문무(文舞)” 그리고 무신들을 위한 춤인 “무무(武舞)”의 반주음악으로 1447년 세종 29년에 완성되었으며,'세종장헌대왕실록'악보 권 138에 전합니다.
세종은 이러한 신악이 음악 연주제도에 미처 정착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조 10년(1464)에 이르러서는 종묘 제례에 중국의 음악이 아닌 우리음악을 쓰고자 했던 세종의 뜻을 이어 신악 중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악으로 채택함으로써 영구히 전승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종묘제례악' 절차에 사용하는 '보태평', '정대업'의 음악은 바로 이 때 만들어져 음악사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종묘제례악 중 '정대업'을 국립국악원 공연실황으로 만나보시겠습니다.
종묘는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입니다.
종묘제례악은 종묘 안에 각기 임금과 왕족의 신위를 모신 종묘(政殿)와 영녕전(永寧殿) 두 사당에 제사 지낼 때 연행되는 악(樂), 가(歌), 무(舞) 형태의 종합예술입니다.
전체 음악은 세종이 작곡하고 세조가 편곡한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으로 구성됩니다.
종묘제례악의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 당시에는 회례악 용도로 창제한 것으로 회례악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5곡은 당시 조선에 전래된 고려 시대 음악을 바탕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음악은 원래부터 무용과 결합된 것으로 무용은 열을 지어 추므로 ‘일무(佾舞)’라하며, 보태평에서는 문무를 상징하는 약과 적(翟)을 손에 쥐고, 정대업에서는 무무를 상징하는 나무창과 나무칼을 들고 춤을 춥니다.
세종대에 회례연에 쓰이던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조 때에 음악을 더 간략하고 제사 순서에 맞게 가사를 만들었는데, 이는 보태평과 정대업이 만들어진 지 18년 만의 일이였으며, 1464년 부터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에서 연주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600여년 동안 유지되어 현재까지도 연주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문화 유산입니다.
[앵커]
이제 다음주면 한글날인데요, 끝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과 또 한국음악의 훈민정음이라고 볼 수 있는 정간보나 신악의 창제에 담긴 뜻을 함께 해석한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인터뷰]
조선왕조 5백년을 이어갈 수 있도록 왕업의 정치적 초석이 세종조에 확고히 마련되었고, 또한 문화적 기반도 뿌리를 내렸던 시기가 세종시대입니다.
세종대왕의 업적들은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600년 전의 과학예술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세종조에 창제된 수많은 신악(新樂)과 음가(音價)표시가 가능한 유량악보인 정간보의 등장은 중국과 일본의 기보법 역사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음악사적 사건이며, 이를 통하여 이러한 세종대의 음악들을 기록화하여 후대에 남길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정간보의 창제는 훈민정음과 함께 세종대왕의 빛나는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을 지닌 '여민락'을 비롯한 새로운 창작음악을 만들어낸 세종의 참뜻은, 새로운 글자를 창안해서 백성을 편리하게 한, 한글 창제의 본뜻과 상통하는 한결같은 애민 정신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종대왕이 꽃피운 조선조 음악문화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국립국악원 강다겸 학예연구사와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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