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경 / 아트디렉터
[앵커]
단색화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박서보 화백이 지난 14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타계했는데요. 故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는 마치 수행하듯 반복해서 그려내는 작업으로 '수행의 예술'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오늘 '사이언스 in Art'에서는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단색화'의 세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수경 아트디렉터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지난 10월 14일이었습니다. 박서보 화백이 타계하셔서 전국적으로 애도의 물결이 일었는데요. 미술계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인터뷰]
네, 말씀하신 대로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국보급 작가였던 박서보 화백 타계 소식이 최근 전해졌죠. 워낙 독보적이었고,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 일조했던 거장이었는데요. 미술계뿐만 아니라 대중들 또한 SNS 등을 통해서 애도의 뜻을 보냈습니다.
특히 박서보 화백이 생전에 각별했던 곳들이 있는데요. 그중 국제갤러리 같은 경우는 박서보 화백의 타계 소식 이후 이현숙 회장의 명의로 추도사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또 부산의 조현화랑도 기존 11월 12일까지였던 박서보 화백의 개인전을 12월 3일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했는데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박 화백의 작품을 보고 기릴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한 것 같습니다.
[앵커]
박서보 화백이 타계하면서 이우환 화백이 박서보 화백에게 편지를 남겼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인터뷰]
네, 맞습니다. 박 화백이 운영했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손편지 하나가 올라왔는데요. 이우환 화백이 멀리 프랑스 파리에서 보내온 애도의 편지였습니다. 제가 문장 몇 가지를 발췌했는데요. "드디어 떠나시는군요. 잘 지키고 버티셨습니다. 그 가난하고 험한 상황 속에서 새 물결을 이루시고 한 시대를 만들어 세계에 우뚝 세웠으니 장하십니다. 이제 거대한 별은 졌습니다. 비워진 빈자리를 메꿀 이 없으니 어이하리까... 오늘도 바람이 불고 그 속에 존재의 목소리 들립니다. 고이 잠드소서"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선두에서 개척자로서, 동지로서, 선의의 경쟁자로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두 작가의 우정이 돋보이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앵커]
그리고 박서보 화백이 단색화의 거장으로도 유명했는데, 오늘 단색화의 역사에 대해서 되짚어 주실 텐데, 재밌는 게 단색화를 해외에서도 그대로 'Dansaekhwa'라고 부른다고요?
[인터뷰]
네, 맞습니다. 단색화는 쉽게 얘기하면 '단색조의 회화'라는 뜻으로 처음 쓰였는데요. 단색화가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 단색화라는 용어라던가 정의에 대해서 좀 더 정교하게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어 왔습니다. 단색화라는 용어 자체는 2000년에 있었던 제3회 광주 비엔날레의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 전시를 기획했던 윤진섭 미술평론가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졌고요. 이후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한국의 단색화' 전시 등을 통해 영문으로 'Dansaekhwa'라고 표기되면서 국내외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됐습니다.
특히 한국의 모노크롬이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에 'Korean Monochrome Painting' 라고 표기할 수도 있었지만, 단색화 단어 그대로 영어로 표기했는데요. 이에 대해서 윤진섭 미술비평가는 당시에 '우리의 것은 우리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앵커]
영어로 그대로 단색화라고 쓰는 걸 보니까 굉장히 멋지다 생각이 드는데요. 단색화가 한국의 모노크롬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시죠.
[인터뷰]
우선 단색화의 시초를 알아보려면, 서양의 모노크롬 형식도 함께 참고하면 좋은데요. 모노크롬 회화는 지난주 방송에서 다뤘던
'이브 클랭' 같은 작가들이 전개하기도 했던 방식으로 195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 유럽에서 성행했던 사조입니다. 당시 현대미술작가들이 이미지나 다양한 색채를 거부하고, 그와 반대되는 아주 단순한 하나의 색만을 사용하면서 회화의 종말을 알린 건데요. 우리나라의 단색화 또한 단순화된 색채가 큰 특징이었기 때문에 모노크롬과 함께 언급되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 단색화는 작가의 행위를 통한 정신적인 고찰과 물성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가 더해지고요. 자연에 대한 회귀 등 동양적인 철학 등이 들어가 있는 점이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앵커]
동양적인 철학이 들어가 있는 점이 궁금한데, 단색화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인터뷰]
단색화는 1970년대부터 80년대 사이에 불안정했던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생겨났는데요. 1950년대부터 서양의 실존주의 철학이라던가 다양한 미술 사조 전개에 국내 작가들도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한국 미술계에서도 해외의 미술비엔날레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목소리를 내고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요. 박서보 화백이 국내 최초의 앵포르멜을 전개했었죠, 정형적이지 않은 '비정형 회화'를 뜻하는 앵포르멜과 기하 추상이 1950년대부터 60년대 사이 등장했고요.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백색 모노크롬이 등장합니다. 백색 단색조를 통해 평면 성을 탐구하는 작업인데요, 대표적인 작가로는 정상화 화백 등이 있습니다. 이후 국내 유수의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단색화를 조명하는 전시가 활발하게 열리고, 해외에서도 한국의 단색화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앵커]
그런데 국내에서 어느 순간 단색화 열풍이 일었던 시기가 있다고 기억을 하는데요. 그 시기가 언제였죠?
[인터뷰]
네, 맞습니다. 2010년대 중후반에 국내 미술 시장을 중심으로 단색화 열풍이 일어나는데요. '단색화 붐'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아무래도 국내외 컬렉터들 사이에서 단색화 작품들에 대한 애호와 수요가 늘면서 경매에도 굉장히 자주 등장하고, 높은 금액에 거래되는데요. 단색화 거장으로 손꼽히는 박서보, 이우환, 정상화, 하종현, 윤형근 등의 작가들이 그 중심에 자리했습니다. 국내 메이저 갤러리들이 앞다투어 전시를 했고요,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도 수십억대로 낙찰되면서 해외 컬렉터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는데요. 아쉽게도 이 열풍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는데요, 단색화를 처음으로 명명했던 윤진섭 미술비평가는 '19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 단색화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고갈됐기 때문'이라고 추측했고요. 그 외에도 '단색화 자체의 정의가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세계화를 위한 전략과 마케팅이 너무 앞섰다. '단색화에 대한 내부적인 정의와 재해석이 필요하다. '등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앵커]
오늘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까 단색화 화풍의 대표작들도 궁금한데 소개해주시죠.
[인터뷰]
네, 박서보, 이우환, 윤형근 화백 등의 작품은 이전 방송에서 몇 차례 다뤘기 때문에 오늘은 정상화 화백의 작품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정상화 화백은 '하얀 그림'으로 유명한데요. 앞서 이야기했던 백색 조 단색화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올해 91살인 정 화백은 "매일매일 새로운 걸 하려고 했는데, 매일매일 똑같은 게 나왔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긴 시간 동안 한결같은 연구와 작업으로 지금의 거장 자리에 오른 작가입니다. 지금 보시는 작품은 2019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세로만 259.1cm, 가로 193.9cm에 달하는 대작입니다. 넓은 캔버스 안에서 색을 절제하고, 평면 성에 대해 끈질기게 연구한 결과물인데요. 1973년부터 단색의 그리드 회화를 시작했거든요. 정상화 화백은 이런 백색 조의 작업을 꾸준히 제작했지만, 어느 하나같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직접 만든 캔버스에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흰색의 흙인 고령토를 바르고 말리는 것을 반복해 만들어지는데요, 마른 고령토가 굳으면서 갈라지면 '그리드'가 생긴다고 하는데요. 그걸 떼어내고 그 안에 색을 담는 겁니다. 바르고, 말리고, 뜯고, 메꾸고,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는 자체가 마치 수행 같기도 합니다.
[앵커]
오늘은 단색화의 정상화 화백 그림까지 이야기 나눠봤는데요. 단색화를 딱 보면 한국의 미와 정적임 그리고, 여백이 주는 정갈함까지 느껴지는 거 같습니다. 한국의 단색화의 한 거장, 박서보 화백은 별이 되었지만, 앞으로도 단색화 장르는 많은 이들의 눈동자에서 반짝거리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사이언스 김기봉 (kgb@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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