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경 / 아트디렉터
[앵커]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소탈하고 수수한 분위기를 그려내면서 우리 정서를 화폭에 담은 박수근 화백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죠. 오늘 <사이언스 in art>에서는 서민의 화가로 불리는 '박수근'화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합니다. 어서 오세요.
[박수경 / 아트디렉터]
안녕하세요.
[앵커]
한국인의 질박한 삶을 표현한 박수근 화가, 어떤 인물인지 먼저 소개해주실까요.
[박수경 / 아트디렉터]
네, 박수근 화백은 서민의 삶을 주제로 소탈하고 담백한 일상을 따뜻하게 담아내는 작가입니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손꼽히는데요. 1914년에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 화백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는데요. 이때 이후로 화가가 되자고 마음먹습니다. 박수근 화백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급하게 기울게 되는데요.
하지만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작업해 결국 꿈을 이뤘습니다. 1932년, 18살의 나이로 조선 미술전람회를 통해 데뷔했고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박수근은 종로구 창신동에 정착했는데요. 도청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또 미군 부대의 PX에서 초상화를 그리거나 영화관이나 가게의 간판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창신동의 좁은 골목골목과 이웃들을 작품 소재로 삼아 그리기도 했는데요.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우리나라 서민의 평범한 일상을 따뜻하게 담아냈습니다.
[앵커]
박수근 화백 그림을 보면 어쩐지 밀레의 만종이 떠오르곤 했는데 정말 이런 사연이 있었던 것 같네요. 박수근 화백의 작품에는 주로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요?
[박수경 / 아트디렉터]
박수근 화백은 우리나라의 정서를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화폭에 담았는데요.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감이나 형태가 아니라, 정말 소탈하고 수수한 분위기를 그려냈습니다. 평범한 서민들의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을 주로 담았는데요. 예를 들면 시골의 아낙네들이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모습이나, 절구질하는 모습 등을 담기도 하고요. 또 농가의 모습이나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공기놀이하는 모습을 소재로 삼기도 했습니다.
[앵커]
그야말로 '서민의 화가'라는 별명이 딱 맞는 화가인데요. 자, 그렇다면 대표작은 뭐가 있나요?
[박수경 / 아트디렉터]
네, 워낙 유명한 작품이 많지만요. 나목을 소재로 한 그림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나무와 두 여인>이 있습니다. 1962년에 그려졌고요. 캔버스 중앙에 가느다란 가지를 드러낸 나무와 함께, 양옆으로 아이를 업고 있는 여인과 머리 위에 짐을 얹은 여인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박수근 화백은 전문적으로 데생을 배우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기존의 어떤 정해진 구도와 법칙 같은 것들에서 벗어난 신선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무와 인물, 배경의 투박한 질감과 어느 하나 크게 튀지 않는 낡은 듯한 색채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작품입니다.
[앵커]
앞서 박수근 화백이 6.25 직후에 종로구 창신동에 정착해 그 주변의 풍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냈다고 하던데요. 어떤 모습에 영감을 받았던 걸까요?
[박수경 / 아트디렉터]
아무래도 휴전이긴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굉장히 오래가죠. 서울의 모습은 그전과는 달리 잿더미로 변해버려서 어른들이 모이는 장소나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다들 거리로 나와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요. 특히 창신동은 동대문과 가까운 거리라서 길가에 노점상이 즐비했다고 하는데요. 서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박수근 화백이 창신동에서 지내면서 이런 주변의 풍경들을 소재로 삼아서 작업했는데요. <소금장수>, <기름장수>, <노상>, <좌판> 등 작품 제목만 들어도 정겨운,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앵커]
그런데 조금 전 나무와 두 여인도 보여주셨습니다만, 이 작품에 유난히 나무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박수경 / 아트디렉터]
네, 박수근 화백은 '나무 화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도 작품에 많이 담았는데요. 특히 특유의 거친 느낌과 잘 어우러지는 '고목'이나 '나목' 그러니까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 남은 나무와 사람을 함께 등장시킨 정감있는 풍경을 잘 담아냈습니다. 1962년에 그려진 '고목과 여인'이라는 작품이 그 예인데요, 두 명의 아낙네와 하나의 큰 고목이 캔버스에 담겨있습니다. 나무가 화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이 나무를 소재로 하면서 비평가들의 다양한 해석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나무가 함께 그려지면서 더 향토적이고 따뜻한 시골의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보입니다. 또 배치 또한 나무가 배경에 속하는 게 아니라 이 그림의 주가 되고, 두 아낙네가 배경이 된 듯이 구성한 것도 특징입니다.
[앵커]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보면 조금은 투박한 느낌이 드는데요. 어떤 작업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합니다.
[박수경 / 아트디렉터]
박수근 화백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기 때문에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쓴다.' 말씀하신 것처럼 박수근 화백은 작품의 질감을 위해 많이 연구했는데요. 자료에 따르면 박수근 화백 작품 특유의 이 거친 질감은 박수근이 태어난 강원도 양구 일대의 자연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는 화강암이 많다고 하는데요. 이 화강암이 가진 재질과 박수근 화백이 그려내는 농촌과 서울의 서민 풍경이 만나서 특유의 화풍이 완성된 겁니다.
박수근의 아들인 박성남 씨가 작업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는데요. 먼저 캔버스 바탕에 기름을 섞지 않은 물감을 바르고, 캔버스 위에 가로, 세로, 번갈아가면서 10번 이상 칠합니다. 한 방향이 아니라 이렇게 십자 방향으로 번갈아 칠해야 특유의 거친 요철 같은 질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암갈색의 표면 질감 위에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선은 박수근 화백 특유의 소탈한 선으로 대상을 그린다고 합니다.
[앵커]
강원도 양구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까 바로 이해가 되는 거 같습니다. 거기가 바위가 많거든요. 한국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박수근 화백의 작품 해외에서 인기는 어떤가요?
[박수경 / 아트디렉터]
박수근 화백이 43살 되던 해에,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전에 참가했지만 아쉽게도 낙선하게 되는데요. 반대로 해외에서는 국내의 한 화랑을 통해서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 조금씩 판매되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컬렉터들이 주로 구매했다고 하는데요. 한국에 방문한 적 있는 외국인들이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보면 한국의 정서를 다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미국 대사관의 가족 등이 박수근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하고요. 이후에 해외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전시하기도 합니다. 또 주한 미 공군사령부가 '박수근 특별 초대전'을 주관하기도 했는데요. 당시에 해외 컬렉터들 사이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앵커]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해외적이지 않나 이런 말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은 박수근 화백,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박 화백의 아내 김복순 여사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는데요?
[박수경 / 아트디렉터]
네, 맞습니다. 박수근 화백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던 이유도 김복순 여사의 지원 덕분이기도 합니다. 먼저 박수근 화백이 춘천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아버지가 재혼해서 지내고 있던 금성에 갔다가 처음으로 김복순 여사를 보게 되는데요.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죠. 빨래터에서 마주치고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복순의 집안에서는 춘천의 의사 집안과의 약혼을 서둘렀다고 하는데요. 이 사실을 알고 박수근 화백이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몸져눕게 되고요. 양쪽 집안의 아버지들끼리 이야기해서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약혼하게 됩니다.
이때 박수근 화백이 아내에게 쓴 편지 내용이 굉장히 로맨틱합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해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내용이었고, 당연히 김복순 여사는 승낙하게 됩니다.
[앵커]
지금 돌아보니까 프러포즈했던 내용을 실제로 이 약속을 지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앞서 김복순 여사가 박수근 화백을 많이 도와줬다고 하셨는데 어떤 도와줬나요?
[박수경 / 아트디렉터]
네, 작품의 모델이 되어주었는데요. 특히 맷돌 돌리는 여인 역할을 주로 했습니다. 김복순 여사가 모델을 해본 적이 없기에 과정이 힘들었지만, 작업이 잘 되어서 입선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도왔다고 합니다. 심지어 만삭일 때에도 몇 시간을 한 자세로 버티며 모델역을 해냈다고 하니 박수근 화백을 향한 사랑의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앵커]
네, 박수근 화백을 최고의 화가로 만드는 데 사랑의 힘도 굉장히 컸던 것 같은데요. 수수하지만, 그 어느 그림보다 큰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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