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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많은 사회 과학자가 많은 사회

imcc*** 2016-01-20 12:19 조회 1686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섬세의 정신과 기하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간은 좌뇌와 우뇌로 생각한다. 좌뇌는 기하의 정신, 디지털 정보를 취급한다. 반면 우뇌는 아날로그 정보로 섬세의 정신의 자리다.

온전한 인간은 섬세의 정신과 기하의 정신이 균형을 이루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파스칼 자신은 섬세의 정신을 경멸했다는 일화가 있다.

섬세의 정신은 나약한 여성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파스칼이 여성 혐오주의자는 아니다. 비록 그가 독신으로 살며 여성들과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 해도 말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한국사회를 섬세의 정신적인 사회인가 기하의 사회인가 분석해 보아야 한다.

나는 한국사회를 섬세의 정신 사회로 진단한다. 이유는 마을마다 동네마다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시를 써내는 시인들이 적어도 한명씩은 존재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는 무척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사회는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들을 적지 않게 알고 있다.

히틀러가 지극히 이성적인 기하정신이 충만했던 독일사회를 간단하게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감수성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대중은 원래 여성적이라 감수성에 호소하는 선동을 하면 쉽게 속아넘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히틀러는 연극등을 보러 다니며 감성에 호소하는 언동을 깊이 연구하여 그런 연출과 연설로 대다수 독일 국민을 현혹하여 집권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감수성은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으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중세의 마녀사냥도 인간 대중의 나약한 감수성을 파고들어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사회는 정이 참 많은 사회라고 말한다. 여민이의 시에 감탄하는 사람들 그렇게 정이 많은 그 사람들이 정작 자기 이웃의 어려움은 쉽게 외면한다.

한국사회의 정이란 겉으로 들어난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사회가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하지 않는 가장 차가운 나라라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이다.

동물적인 본능적인 감수성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무릇 냉철한 이성을 연마해야 한다. 냉철한 이성이야 말로 인간이 선행을 할 수 있는 좌표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감성에 매몰된 사회는 결코 바람직 하지 않다. 한국사회는 기하의 정선은 전혀 없고 섬세의 정신만 가득한 사회다.

정치인들도 합리적인 정책으로 국민을 설득하기 보다는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합리적 사회가 아닌 감정적 사회 감수성만 있는 동물적 사회란 증거다.

파스칼은 섬세의 정신과 기하의 정신의 균형을 주장하지만 정작 본인이 기하의 정신에만 매몰된 삶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자연스런 사회다. 인위적인 사회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감성적 섬세의 정신이 지배하는 조금은 원시적인 사회 그대로 방치된 느낌이다.

사회가 복잡해질 수록 기하의 정신이 매우 필요하다. 그렇게 아름다운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이을 죽여 토막내어 냉장고에 보관하는 잔인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컴퓨터 게임만 하며 딸아이가 굶어죽기 일보직전까지 방치한 엄마 아빠들 그런 감수성에 찌든 어른들이 악귀처럼 우글거리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여민이 같이 아름다운 아이들이 감수성에 찌든 어른들에게 살해당하는 나라가 야만의 나라 감정적인 나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아직도 중세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억지로라도 동네마다 시인들의 시비를 깨부수고 과학자들이 설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강대국이 활거하는 험난한 세계 정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